[농촌목회 예찬론] 주여! 내가 여기 살고 있나이다
정병관 농어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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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여기 살고 있나이다

오 세 효(목사, 함양 지남교회)

일전에 도시교회의 헌신예배를 인도한 후의 일이다.  선배 목사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다과를 나누는데 남자 집사님 한분이 들어오시더니 치사가 자자해서 무안할 지경이 되었다.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는 둥 존경스럽다는 둥 하늘 높이(?) 올려놓더니 하시는 말씀,  
"목사님은 도시에서도 목회를 하실 수 있겠습니다."  
" …? ? ? ! …"
기가 막혔다.  한마디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걸었던 농촌 목회의 평가는 이 한마디로 착각을 벗어나 진실(?)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난 누가 무슨 말로 칭찬해도 무능해서 변두리에 밀려난 농촌목회자일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알았다.  그것도 십 수년이 지난 후에야 …………

세상에는 좋은 곳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한번 다녀가기에 좋은 곳이고 하나는 오래 살기에 좋은 곳이다.  다시 말하면 한번 와서 자연 그대로의 경치를 즐기고 가기에 좋은 젖과 꿀이 메마른 지리산 같은 곳과, 공기도 나쁘고 이웃도 없이 살기 각박하다고 하면서도 편리하고 화려한 생활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젖과 꿀이 줄줄 흐르는 도시가 그렇다.

아름다워서 살고싶다고 말은 하지만 모두 떠나가는 땅, 개척 당시 복음화 비율이 1.7%로 가장 복음화가 안된 땅 !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사람이 살기 가장 험한 환경이기에 아름답다고 다들 말하고, 사람이 살기 험해서 자연이 잘 보존된 관광명소인 지리산은 복음전도에도 가장 험하고 어려운 환경임에 틀림없었다.

뜨거운 사명감에 불타서 시작은 했는데, 결코 쉽지 않았고 별로 이룬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후회되지 않는 보람된 목회에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데 그러나 농촌목회를 원하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작년 이맘때다.  서울에서 고향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부와 함께 목사안수(군소교단 인듯)를 받는다는 이야기며 결혼하여 자녀를 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어디든지 가서 일하겠으니 일할 곳을 소개해 주시면 형님의 목회를 배우고 지도를 받겠다며 날짜 약속까지 하더니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농촌에서 청춘을 바치느니 아마 그냥 놀아도 도시가 좋은가 보다.  실직 노숙자들이 쓰레기를 뒤져도 도시에 소망을 두듯이 ……

도시 개척교회도 비슷한 경우가 더러 있다는데, 처음 지리산 한쪽 구석에서 천막을 치고 시작을 했을 때는 일년이 넘도록 장년교인이 없었고 아동들만 20여명 모아서 열심히 기타 치고 노래하는 팔자 좋은 선생 마냥 온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였다.  처음 교인은, 농촌총각 장가 보내기 운동 시범으로 군청에서 주선하는 유교식 결혼을 하면서 한 달이 못되어서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다음에 전도된 천하보다 귀한 두 영혼 !  그러나 일년 후 한사람은 서울로, 한사람은 세상 일터로 목회자의 마음에 바람구멍을 내고 훌쩍 떠나갔다.  그리고 해마다 고사리 손들이 굵어지면서 실업고등학교로, 대학교로 직장얻어 도시로 도시로 떠나갔다.  이런 현실을 아는 똑똑한 청년들이 농촌목회를 자원할 리 없다.

농촌목회라서 예찬하고 도시목회자는 사명자가 아니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목회에서만 느낄만한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일들이 있기에 감히 농촌목회를 예찬한다.

노령화로 인해 일꾼이 절대 부족한 농촌에서 가장 유능하고 잘 사는 사람은, 수 백마지기씩 모내기를 맡아 못자리를 잘 가꾸는 능력이 있는 일꾼이다.  풍년농사는 못자리를 잘 가꾸는 사람이 중요하고 훌륭한 일꾼으로 인정받듯이 소위 못자리 목회라는 농촌목회 자체가 중요하고 한국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임에 틀림없다.  

처음 시작했을 때, 도시에서 온 선생님과 사모님이라서 좋아하고 기타치며 가르치는 노래가 좋고, 과자나 선물도 좋고 마냥 그냥 좋아서들 모여들었던 꼬마들이 복음을 듣고 꿈을 안고 도시로 도시로 떠나갔는데 세월이 흘러 허허할 때 그 아이들이 신앙생활들을 잘 한다는 고백을 들을 줄이야 ……  살길이 막막해 오직 주님이 소망이던 교인이 병든 남편 모시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그 자녀들도 함께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그토록 열심일줄 그 또한 몰랐다.  동리에서 사람대접 못 받고 따뜻한 밥도 제대로 못 먹던 웃담 오두막 집 그 과부된 교인이, 귀신이 물러가고 건강을 회복하고 자녀따라 서울갔는데 자녀들을 그렇게 시집 장가 잘 보낼 줄, 사람들은 기대도 해보지 않았건만 주님은 우리의 눈물기도를 들으셨다.

한번 맺기는 힘들지만 한번 정든 관계는 좀체로 끊지 않는 사랑과 정이 농촌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한다.

한번은 이웃교회의 헌신예배에 초청을 받아서 광고를 했다.  "저는 오늘 저녁 ○○교회 헌신예배 인도하러 가고 우리교회는 그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인도하십니다.  차량운행을 못해 죄송하지만 다 참석하셔서 은혜받고 또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예배에, 전혀 출석을 안하던 가족들까지 데리고 오신 할머니 집사님이 계셨다.  이유인즉 - 목사님이 우리 식구들 안 와서 다른교회로 가시려는가 싶어, 이제 가지 마시라고 왔다나 ?  신앙생활 제대로 못해서 꾸중(?)만 듣던 집사님이 걸핏하면 삐치더니 다른 교회간다고 우리 집사님과 교인들에게 소문을 낸 일이 있었다.   '갈사람 가야지' 짐작만하고 묵묵히 기다렸더니, 가기는커녕 힘들 때 일꾼이요 곤란할 때 해결사다.  어디 그 한사람뿐이랴 ?  그러나 미운 정 고운 정들면 관계를 끊지 않는 사랑이 있다.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사과 열 개가 있는데 세 개를 먹으면 남은 것은 몇 개?"  "일곱 개", "아니, 세 개". "왜냐고?" "먹는 것이 남는 거니까?"

농촌목회는 열매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나이 많아 이 땅에 잠시 살다가 바로 천국에 가시는 분들은 천국 곳간에 드려진 확실히 남는 열매다.

앞을 보지 못하는 몸으로 구걸로 연명하다시피 하시던 할머니.  당신은 못 보시니까 얼굴이 얼마나 검은지 손이 얼마나 새까만지도 모르고 반갑다고 잡던 그 손으로 기도하고 세례받고 제일 먼저 천국가신 우리 새참이 할머니.  그 할머니의 영혼은 정말 깨끗하고도 맑았는데 ……  힘들고 허전할 때면 떠오르는 할머니의 웃는 얼굴과 기도소리가 다시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이 될 줄 그때는 몰랐었다.  말씀 듣다가 십 수년 저리던 손이 나았다고 몇 달 후에야 간증하시던 할머니 집사님도 교회 맞은편 밭에 육신을 묻었다.  사실 연세가 많은 노인들은 목회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어머니 같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 많다.

농촌목회자 특히 이곳 지리산 목회자들의 교제가 아름답다고들 칭찬이 자자하다.  사실은 경쟁하고 말 것도 없는, 너나없이 가난하고 외롭고 힘들어 서로 위로하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도 하다.  하여간 교회의 거리가 서로 멀기도 하고 보수적이라서 교인들의 이동이나 교세의 비교로 마음상할 일은 별로 없고 나누어야 할 일들은 많아서 형제같은 동지애가 있다.  아내나 아이들에게 옷을 사준 기억이 별로 없는데 서로 잘도 바꿔입고 나누어 입고 얻어 입는다.  나는 싫다고 해도 갖다놓은 청바지도 두 세벌 된다.   의료선교하고 받은 여분의 약도 서로 나누고 재고품 머리핀이며 악세사리도 나누고 학용품도 나누고, 떡도 나누어 먹고 채소도 나누어 먹고, 의료선교나 이·미용선교 하면 여러 교회가 합동으로 모인다.  그리고 누가 떠나가면 그렇게 섭섭해하고 야속해한다.  시장경제와 같은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발전보다 더 좋은 사랑의 교제가 풍성하여 이것이 농촌목회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유명한 모 전도단의 핵심 요원들이 2주간 우리교회에 와서 힘써 전도한 일이 있다.  도시였다면 그 정도면 수 십명씩 전도하고 결신시키는 경력과 체험이 있는 전도자들인데 빈손으로 떠나면서 그들이 한 말이 나의 농촌목회를 정리해 주었다.   "목사님 여기서 이들과 함께 사시는 것이 곧 복음전도입니다."   그래 이제 나도 할말 있다.

주여! 내가 여기 살고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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