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아선교의 현황과 방향성 그리고 농아인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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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선교의 현황과 방향성 그리고 농아인에 대한 이해

李 永 彬 (성남농아교회목사)

농아인(聾啞人)에 대한 이해에 앞서 우리는 먼저 농아인을 어떻게 불러 왔는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예전에는 "귀머거리(become deaf)"나 "벙어리(a deaf-mute)"로 많이 불러왔지만 최근에는 "농아(deaf-and-dumb person)", "청각장애인(Hearing impairment)"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벙어리 즉 농아인은 극히 적은 숫자이고 귀가 듣지 못 하는 농자(聾者)가 대부분이다.
요즘 청각장애인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있으나, 농아인 스스로는 「농아인」으로 불려도 좋은 것 같다고 본다. 호칭은 그 사람에 대한 예우인 만큼 먼저 인격적으로 장애인과의 사귐에 있어 제일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청력(聽力)을 상실한 농아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청력상실에는 여러 가지 불행과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으례 수반되기 때문이다. 맹인과 지체부자유인은 몸은 불편하지만 누구와 만나든 쉽게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농아인은 시각(視覺)의 활용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귀가 먹었다는 이유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슬픈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사실 농아인은 부당한 편견과 경멸의 대상으로 억울한 대우를 피할 수 없던 슬픈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점차 확장되면서 농아인에 대한 일반인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함을 보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농아선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는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기독교(基督敎)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사역에 절대적인 영향을 불가피하게 받게 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농아선교에 대한 태도는 마가복음 7장 31∼37절의 말씀 중 농아인을 고치신 기적 이야기중 "에바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신적 권위로 귀와 입이 열려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이 아람어 "에바다"라는 한마디가 전 세계 수천만 농아인에게는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소중하며 강력한 메시지인가?

본인이 농아가 된 것은 경기 加平에서 출생하여 세살때에 홍역으로 청력을 상실하여 현재까지 농아인으로 지내 왔다. 청와대 부근에 위치된 국립 서울농아학교를 1962년에 입학하여 수화교육과 일반교육을 받아 왔으며 어릴 때부터 영락교회(농아부)에서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1975년에 고교 졸업후 인쇄 문선공으로 직장생활하면서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집사로써 책임을 다하며 값진 경험과 배움을 통해 왔다.
나 자신이 바로 이 세상의 소외된 농아인이면서도 이를 신앙으로 극복하고 수년간에 어머니의 신앙적인 교육과 간절한 기도로써 농아선교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던중에 뒤늦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 농아복음화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감사하고 있다.
필자는 학자가 아니라 오로지 선교현장에서 일하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농아목회적 측면에서의 농아선교의 현황과 방향 그리고 농아인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한다.

1.농아인(聾啞人)은 누구인가?

⑴농아인이 된 원인

농아인은 외형상 일반인과 다름이 없다.
다만, 청각기관(聽覺機關)에 이상(異狀)이 생겨 소리를 의미있게 들을 기능을 상실케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농아인이 되는 원인은 난청과 청기장애(聽器障碍)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듣지 못하여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로 인해 농아인이 되는 것이다.
귀(耳)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기능가운데 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의 기능장애가 난청(難聽) 또는 청각장애(聽覺障碍)로 나타난다.

⑵난청의 분류는 다음의 두가지가 있다.

①선천성 난청 (先天性 難聽, Congenital hearing loss)

선천성 난청은 유전적 원인, 임신초기의 풍진(風疹)이나 기타 바이러스의 감염, 산모의 키니네 복용, 분만시의 물리적 손상 등으로 출생때부터 난청을 초래한 경우를 말하며, 대부분이 감각 신경성 난청이지만 드물게는 선천성 외이도 폐쇄증이나 이소골 기형(耳小骨 奇形)으로 심한 전음성 난청을 보이기도 한다.
양쪽 귀에 심한 난청이 있거나 완전히 듣지 못하여 이로 인해 말을 못하게 된 것을 농아(聾啞, Deaf-mutism)라 하며, 출생시부터 완전히 청각장애가 되어 말을 못하는 것을 선천성 농아(Congenital deaf-mutism)라 한다.

②후천성 난청(後天性 難聽, Acquired hearing loss)

반면 7세 이전에 뇌막염, 성홍열, 홍역, 티프테리아, 화농성 중이염으로 인해 그동안 말을 해 오던 것이 이러한 원인으로 난청이 되어 말을 못하게 된 것을 후천성 농아(Acquired deaf-mutism)라 한다. 대표적인 후천성 난청은 15세 이전에 발생하는 이관염(耳管炎), 아데노이드증식증, 비인두염, 중이염 등에 의해 발생될 수 있다. 성년기에는 반복되는 상기도염증, 급성전염병, 음향성 외상, 약물중독증, 내이염, 청신경종양등 여러 원인으로 난청을 초래하며, 고령으로 인한 노인성 난청도 발생할 수 있다. 전자는 외상성, 중독성 내이장애와 원인불명의 병인(病因)으로 나타나며, 단일 질환으로 취급하고 있다. 후자는 이경화증(耳硬化症), 내이매독(內耳梅毒), 각종 약물 중독성 내이장애에서 볼 수 있다.

③농아의 어원(語原)
따라서 농아인은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본의 아니게 청각장애인이 된다.
그런데 어떤 책을 발견하여 읽은 적이 있다. 아래와 같이 한자의 농자에는 흥미있는 유래가 있다.
농아「聾啞」란 한자 중에서 농「聾」과 이「耳」라는 자(字)위에 용「龍」이라는 字를 붙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귀머거리」라는 뜻의 한자 농“聾”은 용“龍”이라는 字와 이“耳”이라는 字가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용「龍」이란 전설상의 거대한 동물은 소리를 빨리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음(音)을 소리의 파장으로 감지하지 못하고 피부 진동에 의해 감지하기 때문에 용(龍)은 귀먹은 동물이라고 알려졌다. 귀로 소리를 듣지 못하고 뿔로 소리를 느낀다고 해서 듣지 못하는 농아인을 용의 귀-용"龍"과 귀라는 의미의 이"耳"-에 비유하여 농 "聾"이라고 한다.
즉 귀가 듣지 못함에 따라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농아인"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 구약 출 4장11절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분이심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인에 의해 청각을 상실한 농아인도 우리의 이웃이며 역시 하나님의 형상(形像)대로 지으심을 받은 고귀한 인격체(창 1:27)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2.한국농아선교의 현황과 방향성

⑴농아선교의 역사와 현황

①역사

㉠최초의 농교육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특수교육을 실시한 선구자는 북감리교 선교사이며, 의사인 홀(Rosstta Sherwood Hall)여사라는 것이 확실하며, 홀여사는 1909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농교육 사업(聾敎育事業)을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여사가 운영해 온 평양 여맹학원과 농교육이 평양 맹아학교로 통합되었다.
㉡해방전
1931년 4월1일 조선총독부에서 맹아인들의 구호와 교육을 목적으로 경성부 천연동 98번지에 제생원 맹아부(濟生院 盲啞部)를 설치하였다.
이 평양맹아학교에서 1914년에 제1회 동양맹아교육회의가 개최되었으며, 평양맹아학교는 1935년에 홀여사가 미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주로 감리교회와 해외선교사부인회의 후원으로 운영되었다.
마침내 1920년에는 "일본농아협회 경성지부(조선)"가 발족되었고, 1931년 4월19일에 제생원 맹아부를 현재 국립 서울농아학교 자리인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1번지로 이전하였다.
한편 일제치하의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한국인에 의해 주체적인 농교육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즉 이창호(李昌浩)목사는 마펫트선교사(장로교)등의 도움으로 1935년 평양에 평양 광명맹아학교를 설립하여 맹교육과 함께 농교육을 실시하였다.

광복직후 일제치하의 제생원 맹아부는 미군정청에 의하여 관리되어 오던 중 국립맹아학교로 개칭되어, 미국인 특수교육 고문관인 윌톤이 학급의 재편성, 학제변동등을 강행하여 6년제 초등학교로 개편되었다. 이어 1947년 2월에는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관할로 있던 특수학교를 문교부 관할로 이관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중등과를 신설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 특수교육기관이 되었다.
이 무렵 국립맹아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국운(菊雲) 윤백원(尹伯元)선생(1945. 10. 1∼1947. 11. 6)은 1946년 9월1일 드디어 오늘날까지 모든 농아인에게 없어서는 안되는‘한글 지문자’(指文字)를 창안 반포함으로 농아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해방 직전까지는 평양맹아학교 내에서 주일학교가 유일한 농아 종교기관이었다.
이때에 평양맹아학교 교사로 봉사활동하던 박윤삼(朴允三)선생이 주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당시 수화로 농아인들을 위한 교육과 함께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추측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윤삼선생은 1946년 5월에 월남하여 국립 서울농아학교에서 조우(遭遇)한 당시 20세인 졸업반 학생이며 사감 대리를 맡은 계기훈(桂基勳)형제(현,영락농아인교회장로)와 2∼3명이 기숙사에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해방후
1946년 10월 13일(둘째주일)에 영락교회에서 한경직목사의 배려로 "베다니" 3층 예배실『농아전도부』에서 7명이 모여 박윤삼전도사의 지도로 첫예배를 드렸으며 1950년 1월 1일에 (한경직목사의 집전) 처음으로 농아신도 7명이 세례받았다. 6.25 사변으로 각처에 흩어져 2년간 집회를 하지 못하고 환도후, 1953년 3월에 영락교회에서 『농아부』명칭으로 다시 집회를 시작하였다.
박윤삼목사(1953. 3월∼1977. 4월)는 농아부 담임목사로 위임을 받아 농아선교를 위해 목회해 오시면서 부목사 문영진목사(1971. 12월∼1990. 12월)와 함께 일하시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셨다. 두분의 목사들은 능숙하게 수화를 잘 하시는 건청인이셨다.
이어 장로교계통 한국농아선교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농아인 강주해목사(1991∼현재)가 영락농아인교회(종로구 행촌동) 제3대 목사로 위임받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농아인들의 영적 복지를 위해 두분의 고 박윤삼목사와 고 문영진목사로 하여금 농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이 한국농아선교의 효시가 되었다.
②현황
1995년 3월말에 발족된 예장(통합)전국농아인선교협의회 소속교회는 영락농아인교회를 비롯하여 장로교계통 약 33여곳에 이르고, 1995년 12월초에 예장(합동)전국농아교회연합회 소속교회 약 6곳, 한국 에바다농아선교회(기하성수호측) 소속교회등 약 28여교회, 기하성 특수지방회에 소속교회는 약 5곳, 1992년 5월초에 기감 농아교회 전국연합회 소속교회는 약 5곳, 예하성 10여곳, 국제특수선교회(W.O.I.)소속교회는 약 13여곳, 기성과 예성 각 한곳 무소속 농아교회는 약3곳, 모두 합계는 95교회가 되고 있다. (현재 '96년도)
그러나 위의 농아교회중 자체 건물을 소유한 교회는 장로교 영락농아인교회, 온양농아교회, 기하성 광주, 전주 에바다농아교회, 기감 서울, 서산농아교회 약 7곳 뿐 대개 건물을 전세놓은 교회나 일반교회 방을 빌려서 집회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한국 농아교인수는 전국을 통털어서 약 7,000여명정도가 되어 한국의 약35만 농아인구수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이 사실이다.

⑵농아선교의 방향

선교의 방향은 농아 교역자를 양성(養成)하는 것이다.
현재 장로교 계통의 농아교회에는 정식 신학교육을 받는 곳은 대부분 장로교신학대학원이 있어 졸업을 전후하여 교회를 맡아 수화로 설교하며 담임교역자는 대부분 농아인이거나 수화가 능숙한 건청인(현재 약10명)이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농아인들은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문자(文字)도 모르며, 수화(手話)도 모르는 농아인이 태반이다.
일반인중에서 수화를 익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어도 이와 같은 농아인들과 대화할 때는 의사소통(意思疏通)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농아인들 사이에 있어서는 무식하든 유식하든지 관계없이 자신들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또한 자라온 문화가 같기 때문에 어느정도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가는 농아선교는 일반인이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며 농아인이 담당하여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된다.
농아선교(聾啞宣敎)는 농아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인 만큼 특수한 방법 즉, 말(언어)이 아닌 수화(手話)를 사용해야 한다.
농아학교에 다닌 일이 없는 무학농아인의 경우 수화를 배울 기회가 없으므로 예배에 의미있게 참여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으나 수화반에 등록시켜 수화교육을 받은 후에는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며 성경공부에 참여할 수 있다.

⑶한국 농아선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 재정적 어려움을 들 수 있다.
농아 교역자를 통한 선교할 때에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는 농아 교역자에 대한 생계 대책이다.
농아교인들의 생활수준이 대체로 빈민층에 속하여 농아교회가 영세성(零細性)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 100명이상이 모이는 교회인 경우 재정적 자립이 가능하지만 재정적 운영 능력을 가진 농아교회는 아직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농아인 교역자에 대한 후원문제 시급하다.

둘째, 농아 교역자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대 소도시에 일부 농아교회가 설립되어 있지만 아직 비교적 한국농아복음화가 부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도시에는 농아인구가 많이 때문에 대도시에 농아교회를 설립해야 농아인의 복음화가 급속히 이루어 질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도시에 농아교회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물론 재정적 어려움도 있지만 농아 교역자가 부족한 탓이 크다.

세째, 농아인의 거주 분포가 광범위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농아인들의 거주 분포는 매우 광범위하고 농아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교인들이 상당수 있어 이들의 교통문제 또한 적지 않다. 불행히 대부분의 농아교회는 차량을 소유하지 못해서 원거리 거주 교인들의 교통 불편을 해소해 주지 못하므로 예배출석의 의욕을 감소시키고 있다.
현재 수도권 지역은 다행히 전지역이 전철화되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3.농아인에 대한 이해(理解)

농아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경에서의 농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밝혀 주는 구절을 골라 열거해 보기로 한다.
이 구절들은 농아인들에게 들려 줌으로써 농아인들의 긍정적 자아관(自我觀) 확립에 기여할 수도 있다고 본다.

(1)구약에 나타나는 농아관(聾啞觀)

①출 4:11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사람의 입을 누가 만들었느뇨? 누가 사람을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되게 하며, 사람에게 밝은 시력(視力)을 주고 맹인이 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나 여호와가 아니냐?"고 말씀하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농아인으로 하여금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게 하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농아인을 농아로 만드셨으니 농아인을 열등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하나님께 대한 모독임을 깨닫게 된다.

②레 19:14에 보면 "또 너희는 귀머거리를 저주하거나 소경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나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라. 나는 여호와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약자와 불행한 자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보면 장애자는 신체적인 부자유로 인해 어려움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인(盲人)들은 식탁에 앉았을 때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먹어야 할 것인지 제대로 찾아서 먹을 수도 없으며, 또한 사랑하는 아내에게 멋있는 의상을 선물을 하였을 때 보지 못하는데 그 심정은 어떠할까?
농아인들도 작업장에서 공동작업을 하면서 조그마한 잘못이 있을 때 듣지 못한다고 욕설을 하는 것을 상대방의 모습을 보아 짐작하는데 이러한 인격적인 모독을 받았을 때 그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자녀가 출생하여 양육할 때 심야에 아기는 배가 고파 심히 울고 부모는 듣지 못하므로 계속 잠에 취하였을 때 그 아기는 어떻게 되겠는가?
꼭 상대방에게 전화 통화하여야 할 때 입이 있어도 말을 전달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일반 대학에서 교수가 강의하여 듣지 못하므로 농아인 대학생에게는 그 피해가 대단하다.
또한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이 있어 너무나 안타깝다.

③사 35:5-6에 보면 "그때 소경의 눈이 뜨이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절음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가 기뻐 외칠 것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 구절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소경된 자(盲者)와 귀머거리된 자(聾者)와 저는 자(小兒麻痺)와 벙어리된 자(啞者)를 이적으로 고쳐 주실 사실에 대하여 예언하여 주는 것이다(마 11:5).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통하여 육신을 잘 되게 하는 은혜보다 영혼이 잘 되게 하는 은혜를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나 귀머거리된 자 곧,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무엇보다도 귀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서두에 나온다.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라" 함은 전에는 선한 일을 전연 행치 못하던 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예한 후 모든 선한 행동을 힘있게 행한다는 뜻이다.
행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곧 전에는 하나님에게 대하여 찬송할 줄 모르는 벙어리 같은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예한 후 하나님께 감사하며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이다.
농아인들이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소리없는 영혼의 수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신약에 나타나는 농아관

①요 9:1-7에 보면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누구의 죄로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났습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라고 제자들의 잘못된 관념을 뜯어 고치셨다.
농아인이 된 것은 농아인 자신이나 부모의 죄의 결과라는 편견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이 구절을 통해서 깨우쳐서 농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라는 것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②막 7:31-37에 보면 예수께서 귀먹고 어눌(語訥)한 자를 고치신 기적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예수님의 농아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이신 일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또 손가락에 침을 뱉아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서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한숨을 쉬시며 "에바다!"하고 외치셨다. 이것은 "열리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제대로 말을 하게 되었다.
보통 같으면 그냥 안수하여 고치실 수 있는데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신 것은 농아인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사랑하신 연고라고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흥미있는 것은 양 귀에 손가락을 넣는 행위나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 대신 것은 일종의 수화나 제스츄어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수화를 사용하신 흔적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신유 기적중에 유일한 경우임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는가?
그것은 농아인에 대한 지극한 연민(憐愍)의 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농아인은 겉은 멀쩡해 보여도 청각장애로 인해 의사소통(意思疏通)이 원활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안고 있다.
영적으로 볼 때 농아인은 맹인이나 지체자유자들보다 더 불리한 입장에 있다.
왜냐하면 귀가 어두운 까닭에 복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가장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맹인이나 다른 신체장애인을 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일이 없는 것을 보면 농아인이야말로 영적으로 볼 때 가장 불리하고 불행하며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에바다"하심으로 농아인의 귀가 열리고 맺혔던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는 농아인에게도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농아 선교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③눅 1:5-23에 보면 헤롯이 유대왕으로 있을 때 아비야 반열에‘사가랴’란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 엘리사벳도 아론의 후손이었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주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빈틈없이 지켰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임신을 못하는 몸이어서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두사람이 모두 나이가 많아 늙었다. 사가랴는 제사장직의 관례대로 제비를 뽑은 결과로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때 주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향단 오른쪽에 서자 그는 천사를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에게 가로되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요한’이라고 불러라. 너도 기쁘고 즐겁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태어난 것을 기뻐할 것이다. 그 아기는 주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며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태에 있을 때부터 성령이 충만하여 많은 이스라엘 사람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 할 것이다. ‘요한’이란 사람은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들에게 돌아서게 하고 순종치 않는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의 지혜를 갖게 하여 백성들이 주님을 맞이 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나는 늙었고 내 아내도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고 묻자 천사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가브리엘이다. 하나님께서 이 기쁜 소식을 너에게 알리라고 나를 보내셨다.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농아가 되어 말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내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가랴가 분향하는 동안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으며 그를 기다리다가 성전안에 너무 오래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사가랴가 드디어 밖으로 나왔으나 말을 하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그가 성전안에서 환상을 본 줄로 알았다.
사가랴가 "형용(形容)으로 뜻을 표시(表示)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22절)" 즉 사람들에게 손짓만 하고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있다가 그의 직무기간이 끝난 다음에 집에 돌아갔다.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라고 함은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수화표현)으로 자기의 뜻을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화를 그들의 주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수화(手話)로서 자신의 의사(意思)를 표현하고 수화를 통하여 상대방의 의사를 전달 받게 된다. 농아인에게 있어서 수화(手話)는 의사소통 수단일 뿐만 아니라 지식을 함양(涵養)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중요한 매체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경구절들을 인용하여 농아인들에게 청각장애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주지시킴으로 그들에게 긍정적인 자아관을 효과적으로 심어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그러면 농아인에게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① 농아인에 대해서는 결코 냉담하거나 경멸적인 태도를 견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농아인의 정서에 대하여서는 어떤 이들은 "벙어리가 화나면 살인한다, 농아인들은 고집이 세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처럼 농아인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편견은 없을 것이다.
농아인들은 듣지 못해서 지식을 얻지 못했거나 지체된 사람들로 정보 수집력이 떨어져서 일반인들 보다 일반적으로 자기 중심적 사고가 강할 뿐이다. 결단코 그 성격이 난폭하거나, 고집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같다고나 할까 일반적들과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다소 자기 중심적 사고가 많고, 성격이 다소 단순화된 경향을 보인다는 것 외에 다를 바 없다.
일반인들의 편견의 원인은 대화의 단절에서 오는 것으로 전혀 오해이다.
농아인들 끼리의 만남에 대하여서는 일반인들은 어느 곳엘 가도 사람이 너무 많아 서로 발에 걸릴 지경이다.
그러나 농아인들의 경우는 다르다. 대 소도시를 제외하면 한 동네 1∼2명 또는 없는 곳도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 사람이 그리워진다. 무언가 얘기하고 대화할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또 모처럼 만나면 쉽게 헤어지기 어렵다.
이런 입장을 일반인 가족들은 이해 해줘야 한다. 가정에 가족이 많아도 대화가 안 통하면 언어적인 벽이있는 것이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그건 모두 나무와 풀과 다를 바 없다.
오직 같은 입장에서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사람이요, 친구요, 가족이다.
따라서 농아인들의 동료간의 만남이나 모임, 농아교회 모임이나 기타 자신들의 만남을 막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치명적인 소외가 되어 그 부작용도 그만큼 클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농아인을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인 동물이란 사람이 나혼자서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농아인들이 수화를 통해 대화하는 모습은 일반인이 볼 때 흡사 외국인의 뜻을 모를 대화에 불과하다.
더구나 농아인과 직접 맞닥치면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당황하기 일쑤다.
그 만큼 농아인들과 일반인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의사소통 수단이 없기 때문에 수화교육에 대한 정보 및 수화보급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수화를 배우려고 수강신청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사실이지만 중단할 사람이 많고 끝까지 익히는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이기에 아쉬운 일이다.

농아인들이 느끼는 불편은 관공서나 병원등에 일이 있어 찾아 가면 필담으로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필담도 할 수 없이 의사소통이 안되어 제대로 원하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병원에서는 농아인들이 제대로 증상을 의사에게 전달할 수 없으며 심지어 접수과정에서조차 거절당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농아인을 위한 수화통역원의 배치가 시급하고 본다.

② 농아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무가 있다.
농아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인 이상 구원의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다.
불행히 농아인은 청력상실로 인하여 복음을 접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믿음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상실한 청력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게 해 주셨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아인에게 청력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그가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게 하심이 예수님의 자상한 배려임을 이해해야 한다.

③ 농아인보다 앞장 서지 않아야 한다.
막 2:1-12에 보면 어떤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나 기적적으로 나음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중풍병자보다는 그를 예수께로 수고로 인도한 네 사람들이 더욱 돋보이는 내용이다.
이 네 사람들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중풍병자와 어떤 관계인지 아는 바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네 사람들이 모두 육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누가 농아인의 진정한 벗이 될 수 있을까?
진정 농아인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농아인들의 구원을 위해 농아선교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관심을 쏟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농아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야 한다. 농아인의 진정한 벗은 농아인을 전면에 내세우되 자기는 뒤에서 숨어 농아인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농아인은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있는 우리의 가족이며 형제자매들이다.
이웃이 된 우리는 사랑으로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함께 산다는 것은 먼저 농아인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것이다.
가장 쉽게 접근할 방법은 무엇보다도 거짓이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능숙하게 수화도 잘 해야 한다.

요일 4장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7-8)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이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자매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계명(요 13:34-35)을 예수께 받았다는 사실을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심신장애인(心身障碍人)이라 함은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정신이나 육신이 부자유스러운 사람을 총칭한다.
유엔(U.N)에서 1981년을「세계 장애자의 해」로 명명하고 매년 4월20일을 심신장애인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이는 모든 장애인들에게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한발 더 나아가 장애인들을 보다 더 인격적인 관계로 대하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장애인의 소망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장애인들을 형제와 같이 자녀와 같이 사랑하며, 장애인들과 서로 도우는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

한편, 우리는 농아인과 일반인 사이의 거리감을 해소하고 나아가 우리 나라는 물론 북한, 아시아, 세계에까지 농아선교의 문이 활짝 열어 더 많은 농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과 영생을 얻도록 기독교인의 끊임없는 사랑과 기도를 거듭 부탁드린다. 1996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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