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선교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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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선교에 대한 이해
A.선교의 개념/1
B. 장애인 선교의 명칭/2
C. 장애인 선교의 성경적 배경/3
1. 구약에서의 장애인 선교/3
2. 신약에서의 장애인 선교/6II.장애인 선교에 대한 이해
A.선교의 개념.
선교 또는 선교학의 개념은 정의를 내리는 사람의 신학적인 배경에 따라서 그 정의가 다르다. 선교란 말 자체가 오늘날 퍽 애매한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이해도 각양각색으로 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카이퍼(R. B. Kuiper) 박사는 전도와 선교는 결국 같은 뜻이라고 했다. 다만 전도는 같은 문화권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선교라고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이해한 선교 개념이다. 2차 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교회는 해외 선교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전도에 강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선교 신학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 교회는 분열로 말미암아 선교 지에 혼란을 주게 되었고, 이것은 선교에 큰 장대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 연합 운동이 선교에서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서구 교회 지도자들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포기하고 사회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과는 반대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강조하여 거기에 대한 전략 개발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내에서도 폭넓은 선교 개념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선교를 타 문화권 전도로만 국한하지 않고 전도와 사회 봉사를 선교로 간주한다. 영국의 스톳트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양극화를 절충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스톳트는 교회는 봉사의 단체일 뿐 만 아니라 예배의 단체이며 예배와 봉사가 서로 소속 적이긴 하지만 혼동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에큐메니칼 선교를 부정한다. 동시에 그는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선교 관을 주장한다.
케인도 선교를 영혼 구원과 사회 봉사로 해석한다. 그는 "복음주의 선교를 전도와 동일시하여 영혼 구원은 잘 하지만,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 데는 느리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봉사활동은 잘 하지만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양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경과 선교역사에서 살펴볼 때 선교는 전도뿐만 아니라 교회개척과 의료봉사, 교육 사업등 모든 봉사활동도 선교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전도는 "복음의 구속적 선포"라는 활동이며, 선교는 전도와 사회봉사가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면 올바르고 균형 잡힌 선교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인적인 선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선교는 인간생활 전역의 복음 화이다. 비록 선교의 주목적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교회는 선교사업의 대상자들이 영적 필요뿐만 아니고 육체적 필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영-육 통일체적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여 "영혼구원"과 같은 표현들을 지양해야 하며 선교에 있어서 포괄적인 접근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B.장애인 선교의 명칭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장애인선교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교(mission)로 보느냐 목회나 사역(minister)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전 호진은 "선교 학"에서 선교를 타 문화권에서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의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의 모든 활동, 즉 교육사업,의료사업,개발사업,구제사업등 모든 교회의 봉사활동을 선교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서 행하는 전도 활동과 교회의 봉사 활동을 전혀 배제하지 않고 편의상 타 문화건권에서 행하는 전도와 봉사 활동에 국한하고자 한다고 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선교란 타 문화권 선교인 것이다. 또한 "토착화"(contextualization)를 저술한 헤셀그레이브(Daid J. hesslgrave)와 로맹(Edward Rommen)의 주장으로 보아도 선교는 타 문화권 선교임을 어림할 수 있다."다양한 선교 관, 문화, 심리상태의 사람들과 관련되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작용하도록 만드는 일에 봉사하는 일이 선교의 역할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교를 타 문화권 선교로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은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만으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움텄다. 그래서 F.M-1, F.M-2, F.M-3의 개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인 선교는 특수한 선교(Special Mission)라기 보다는 특수한 목회나 사역(Special Minister)이라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장애인 선교는 타 문화권선교가 아니기에 특수사역(Special Minister)의 한 분야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장애인 선교는 나름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다. 예를 들면 농아 인은 일반언어와 완전히 다른 수화를 언어로 가지고 있고, 이 수화는 일반 언어체계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수화를 사용하고 있는 농아인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유형이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차이점이 있다. 맹인도 점자라는 특수한 언어 표현방식을 지니고 있고, 촉각과 청각을 통해서만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기에 독특한 사고방식과 삶의 유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정신 지체인들은 이러한 예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장애인선교의 대상자 대부분이 특수한 상황에 처한 점을 감안할 때에 이들의 생존환경이 이질 문화권임을 충분히 단정할 수 있다. 장애인 선교를 'Mission'으로 보는 것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본다.
C. 장애인 선교의 성경적 배경
뉴비긴(Newbegin) 감독은 "선교의 신학은 성서 연구에 그 생명력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장애인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 선교를 말할 때, 장애인 선교의 성경 적 배경과 근거를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1. 구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구약에는 '약자 보호법'이 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를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에 근거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구원의 하나님, 물의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심판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런데 구약 전체를 통해서 두르러지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시는 '약자의 보호자'로서 하나님의 모습이다. 신명기 10장 18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잘 밝혀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들을 신원(伸寃)하시고(즉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시편에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시68:5). 이밖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힘없고 약한 자, 고난 당하는 자들의 외침을 들에 주신다는 것은 구약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또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빈궁한 자들의 보호 성이 되신다는 말씀도 있다(이사야25:4).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며 이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어떤 윤리학자는 구약성경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약자에 대한 끈질긴 편애를 가지고 계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 미워하고 학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동인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도 사랑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신앙적인 논리이다.
이런 배경에서 구약의 '약자보호법'이 마련이 되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현대에 적용하면 어떤 부류가 속하는 것일까? 이 상진은 성경에 나타난 "고아와 과부"의 의미를 신분과 형편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현대의 장애인과 노인에게 적용하고 있다. 손봉호 역시 그의 책 [고통받는 인간]의 머리말에서 우리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현대에서 약자에 속하는 부류는 이뿐 아니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원화될수록 그것은 더욱 세분화될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이 현대의 약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된 기독교인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약자들의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외침에 우리들의 귀를 열고 우리들의 손을 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의 도리요 책임인 것이다. 그러면 약자보호법의 내용을 정 형석의 글과 박 준서의 글을 참고로 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구제를 위한 십일조
신명기 14:28-29과 26:12-15에 보면 모든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가운데 3년마다 한번씩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한 십일조, 즉 구제 십일조를 드렸다. 하나님께 바쳐진 구제 십일조는 저축하여 두었다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하여 사용했다.
2)추수법
이스라엘에는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추수법이 있었다(레19:9-10,신23:22,24:19-21).곡물을 벨 때에는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않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 또 포도 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배려였다. 룻기 2:23을 보면 과부 룻이 흉년 때에 이삭을 주어 媤母 나오미와 함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3)안식년과 희년
안식년은 6년 동안 땅을 경작하고 7년째에는 땅을 쉬게 하는 제도이다. 이때 저절로 생산되는 곡물과 포도 등의 소출은 땅 주인과 종들과 나그네와 심지어 들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이었다. 또 안식년이 되면 과거에 꾸어 준 모든 빚을 면제해 주고 히브리 종들도 자유를 얻었다. 희년(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에 오는 해)이 되면 종이 해방되고, 판 땅도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등 모든 것이 원상 회복되는 해였다(출23:10-11,레25:1-7,25:18-22,25:23-33).
4)종교적 절기(신16장,예9:20-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지키는 유월절(무교절), 맥추감사절인 칠칠절(초실절),추수감사절인 장막절(초막절,수장절)등의 3대 절기는 빈부나 사회적인 지위에 관계없이 함께 즐거워하는 날이었다.
5)가난한 자의 제물과 예물
구약성경에는 성전예배와 제물에 대한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양에 미치지 못하면 집비둘기들이나, 산비둘기 새끼들로 드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레5:7,5:11,12:8,14:21,27:8).
6)권력을 가진 자의 책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책임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힘있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지만, 힘이 없는 자는 스스로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재판에 있어서도 약한 자라고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출23:6,신24:17,27:19).
7)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법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법은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과 꾸어주는 것과 품삯을 주는데 필요한 원칙이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구제해야 하며 돈이나 물건을 꾸어주는 경우에 이자나 이식을 받는 것이 금지되었고, 담보물을 받는 경우에도 여러 가지 규정이 있었으며, 일꾼의 품삯은 반드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출22:25-27,레19:13,25:35-38,신15:7-11,23:19-20,24:10-15).
2. 신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땅 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예수님의 선교는 장애인 선교였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숱한 말씀 가운데에는 장애인의 이야기가 엄청나게 포함되어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의 대다수가 장애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소외받은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다(막6:34).멸시받거나 소외된 무리를 예수님은 만나주셨고, 구원의 복음을 전했고 ,병든자를 고쳐주셨고, 멸시천대받은 자는 높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누가복음 4:18-19과 마태복음 11:5같은 구절에서 요약적으로 볼 수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라난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셨던 적이 있다. 다음과 같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4-19). 그리고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잡혀 갔을 때,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자, 메시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사야 35장을 인용하신다."너희가 가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5:4-5,눅7:22).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자든지 부자든지 차별이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주님되심을 알리는 은혜로운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가난하며 병든 자들을 민망히 여기시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곧 자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의 '큰 심판 비유'에 잘 나타나고 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은 구원받은 자의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실천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는 말씀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율법을 재조명한 것이다. 예수의 삶속에서 소외받은 자들이 절대로 선교에서 외면받는 일이 없어야 함을 알게 된다.
이같이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장애인 선교를 하셨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가복음 4:16-18에 보면 장애인 선교가 메시야로서 해야 될 일임을 알 수 있다(눅7:22,마11:4-5).
둘째, 장애인을 깊이 사랑하심으로 장애인 선교를 하셨다. 마태복음 20:29-3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맹인 두 사람을 만나셔서 그들의 눈을 고치실 때, 민망히 여기사 고치셨으며, 마가복음 7:31-37에 보면 갈릴리 호수에서 귀먹고 어눌한 농아 인을 만나서 그를 고치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고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장애인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들의 장애를 안타깝게 여기신다는 의미이다.
셋째, 전인 구원적인 장애인선교를 하셨다. 마태복음 9:1-8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들것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지체장애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의 장애를 고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9:1-41에는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을 고치시고 자신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전도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치료하시는 전인 구원적인 사역을 하셨다.
넷째, 부정적인 장애인 관을 긍적적인 장애인 관으로 바꾸셨다. 우리는 그것을 요한복음 9:2-3에서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8:1-4에서 예수님은 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은 죄의 결과로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죄로 인한 부정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병환자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으며, 만지지도 못하게끔 율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지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이것은 장애를 보는 눈이 일반인과 다르셨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섯째, 장애인 선교를 통하여 일반인 선교를 이루셨다. 마태복음 4:24-25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자 그의 소문이 퍼져 많은 무리가 좇았다고 했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장애인을 고치시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만,고침받은 장애인은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했다.
이와 같이 한 장애인이 예수를 만나 변화된다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듣게 된다. 그래서 장애인 선교는 단순히 장애인들에게만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된 삶과 사랑의 장애인 선교현장, 장애인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토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전을 주는 생산적인 선교이다.
A.선교의 개념/1
B. 장애인 선교의 명칭/2
C. 장애인 선교의 성경적 배경/3
1. 구약에서의 장애인 선교/3
2. 신약에서의 장애인 선교/6II.장애인 선교에 대한 이해
A.선교의 개념.
선교 또는 선교학의 개념은 정의를 내리는 사람의 신학적인 배경에 따라서 그 정의가 다르다. 선교란 말 자체가 오늘날 퍽 애매한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이해도 각양각색으로 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카이퍼(R. B. Kuiper) 박사는 전도와 선교는 결국 같은 뜻이라고 했다. 다만 전도는 같은 문화권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선교라고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이해한 선교 개념이다. 2차 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교회는 해외 선교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전도에 강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선교 신학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 교회는 분열로 말미암아 선교 지에 혼란을 주게 되었고, 이것은 선교에 큰 장대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 연합 운동이 선교에서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서구 교회 지도자들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포기하고 사회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과는 반대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강조하여 거기에 대한 전략 개발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내에서도 폭넓은 선교 개념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선교를 타 문화권 전도로만 국한하지 않고 전도와 사회 봉사를 선교로 간주한다. 영국의 스톳트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양극화를 절충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스톳트는 교회는 봉사의 단체일 뿐 만 아니라 예배의 단체이며 예배와 봉사가 서로 소속 적이긴 하지만 혼동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에큐메니칼 선교를 부정한다. 동시에 그는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선교 관을 주장한다.
케인도 선교를 영혼 구원과 사회 봉사로 해석한다. 그는 "복음주의 선교를 전도와 동일시하여 영혼 구원은 잘 하지만,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 데는 느리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봉사활동은 잘 하지만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양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경과 선교역사에서 살펴볼 때 선교는 전도뿐만 아니라 교회개척과 의료봉사, 교육 사업등 모든 봉사활동도 선교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전도는 "복음의 구속적 선포"라는 활동이며, 선교는 전도와 사회봉사가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면 올바르고 균형 잡힌 선교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인적인 선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선교는 인간생활 전역의 복음 화이다. 비록 선교의 주목적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교회는 선교사업의 대상자들이 영적 필요뿐만 아니고 육체적 필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영-육 통일체적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여 "영혼구원"과 같은 표현들을 지양해야 하며 선교에 있어서 포괄적인 접근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B.장애인 선교의 명칭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장애인선교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교(mission)로 보느냐 목회나 사역(minister)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전 호진은 "선교 학"에서 선교를 타 문화권에서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의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의 모든 활동, 즉 교육사업,의료사업,개발사업,구제사업등 모든 교회의 봉사활동을 선교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서 행하는 전도 활동과 교회의 봉사 활동을 전혀 배제하지 않고 편의상 타 문화건권에서 행하는 전도와 봉사 활동에 국한하고자 한다고 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선교란 타 문화권 선교인 것이다. 또한 "토착화"(contextualization)를 저술한 헤셀그레이브(Daid J. hesslgrave)와 로맹(Edward Rommen)의 주장으로 보아도 선교는 타 문화권 선교임을 어림할 수 있다."다양한 선교 관, 문화, 심리상태의 사람들과 관련되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작용하도록 만드는 일에 봉사하는 일이 선교의 역할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교를 타 문화권 선교로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은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만으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움텄다. 그래서 F.M-1, F.M-2, F.M-3의 개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인 선교는 특수한 선교(Special Mission)라기 보다는 특수한 목회나 사역(Special Minister)이라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장애인 선교는 타 문화권선교가 아니기에 특수사역(Special Minister)의 한 분야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장애인 선교는 나름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다. 예를 들면 농아 인은 일반언어와 완전히 다른 수화를 언어로 가지고 있고, 이 수화는 일반 언어체계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수화를 사용하고 있는 농아인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유형이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차이점이 있다. 맹인도 점자라는 특수한 언어 표현방식을 지니고 있고, 촉각과 청각을 통해서만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기에 독특한 사고방식과 삶의 유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정신 지체인들은 이러한 예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장애인선교의 대상자 대부분이 특수한 상황에 처한 점을 감안할 때에 이들의 생존환경이 이질 문화권임을 충분히 단정할 수 있다. 장애인 선교를 'Mission'으로 보는 것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본다.
C. 장애인 선교의 성경적 배경
뉴비긴(Newbegin) 감독은 "선교의 신학은 성서 연구에 그 생명력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장애인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 선교를 말할 때, 장애인 선교의 성경 적 배경과 근거를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1. 구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구약에는 '약자 보호법'이 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를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에 근거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구원의 하나님, 물의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심판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런데 구약 전체를 통해서 두르러지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시는 '약자의 보호자'로서 하나님의 모습이다. 신명기 10장 18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잘 밝혀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들을 신원(伸寃)하시고(즉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시편에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시68:5). 이밖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힘없고 약한 자, 고난 당하는 자들의 외침을 들에 주신다는 것은 구약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또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빈궁한 자들의 보호 성이 되신다는 말씀도 있다(이사야25:4).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며 이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어떤 윤리학자는 구약성경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약자에 대한 끈질긴 편애를 가지고 계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 미워하고 학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동인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도 사랑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신앙적인 논리이다.
이런 배경에서 구약의 '약자보호법'이 마련이 되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현대에 적용하면 어떤 부류가 속하는 것일까? 이 상진은 성경에 나타난 "고아와 과부"의 의미를 신분과 형편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현대의 장애인과 노인에게 적용하고 있다. 손봉호 역시 그의 책 [고통받는 인간]의 머리말에서 우리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현대에서 약자에 속하는 부류는 이뿐 아니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원화될수록 그것은 더욱 세분화될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이 현대의 약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된 기독교인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약자들의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외침에 우리들의 귀를 열고 우리들의 손을 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의 도리요 책임인 것이다. 그러면 약자보호법의 내용을 정 형석의 글과 박 준서의 글을 참고로 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구제를 위한 십일조
신명기 14:28-29과 26:12-15에 보면 모든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가운데 3년마다 한번씩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한 십일조, 즉 구제 십일조를 드렸다. 하나님께 바쳐진 구제 십일조는 저축하여 두었다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하여 사용했다.
2)추수법
이스라엘에는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추수법이 있었다(레19:9-10,신23:22,24:19-21).곡물을 벨 때에는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않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 또 포도 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배려였다. 룻기 2:23을 보면 과부 룻이 흉년 때에 이삭을 주어 媤母 나오미와 함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3)안식년과 희년
안식년은 6년 동안 땅을 경작하고 7년째에는 땅을 쉬게 하는 제도이다. 이때 저절로 생산되는 곡물과 포도 등의 소출은 땅 주인과 종들과 나그네와 심지어 들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이었다. 또 안식년이 되면 과거에 꾸어 준 모든 빚을 면제해 주고 히브리 종들도 자유를 얻었다. 희년(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에 오는 해)이 되면 종이 해방되고, 판 땅도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등 모든 것이 원상 회복되는 해였다(출23:10-11,레25:1-7,25:18-22,25:23-33).
4)종교적 절기(신16장,예9:20-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지키는 유월절(무교절), 맥추감사절인 칠칠절(초실절),추수감사절인 장막절(초막절,수장절)등의 3대 절기는 빈부나 사회적인 지위에 관계없이 함께 즐거워하는 날이었다.
5)가난한 자의 제물과 예물
구약성경에는 성전예배와 제물에 대한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양에 미치지 못하면 집비둘기들이나, 산비둘기 새끼들로 드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레5:7,5:11,12:8,14:21,27:8).
6)권력을 가진 자의 책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책임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힘있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지만, 힘이 없는 자는 스스로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재판에 있어서도 약한 자라고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출23:6,신24:17,27:19).
7)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법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법은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과 꾸어주는 것과 품삯을 주는데 필요한 원칙이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구제해야 하며 돈이나 물건을 꾸어주는 경우에 이자나 이식을 받는 것이 금지되었고, 담보물을 받는 경우에도 여러 가지 규정이 있었으며, 일꾼의 품삯은 반드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출22:25-27,레19:13,25:35-38,신15:7-11,23:19-20,24:10-15).
2. 신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땅 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예수님의 선교는 장애인 선교였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숱한 말씀 가운데에는 장애인의 이야기가 엄청나게 포함되어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의 대다수가 장애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소외받은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다(막6:34).멸시받거나 소외된 무리를 예수님은 만나주셨고, 구원의 복음을 전했고 ,병든자를 고쳐주셨고, 멸시천대받은 자는 높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누가복음 4:18-19과 마태복음 11:5같은 구절에서 요약적으로 볼 수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라난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셨던 적이 있다. 다음과 같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4-19). 그리고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잡혀 갔을 때,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자, 메시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사야 35장을 인용하신다."너희가 가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5:4-5,눅7:22).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자든지 부자든지 차별이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주님되심을 알리는 은혜로운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가난하며 병든 자들을 민망히 여기시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곧 자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의 '큰 심판 비유'에 잘 나타나고 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은 구원받은 자의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실천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는 말씀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율법을 재조명한 것이다. 예수의 삶속에서 소외받은 자들이 절대로 선교에서 외면받는 일이 없어야 함을 알게 된다.
이같이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장애인 선교를 하셨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가복음 4:16-18에 보면 장애인 선교가 메시야로서 해야 될 일임을 알 수 있다(눅7:22,마11:4-5).
둘째, 장애인을 깊이 사랑하심으로 장애인 선교를 하셨다. 마태복음 20:29-3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맹인 두 사람을 만나셔서 그들의 눈을 고치실 때, 민망히 여기사 고치셨으며, 마가복음 7:31-37에 보면 갈릴리 호수에서 귀먹고 어눌한 농아 인을 만나서 그를 고치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고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장애인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들의 장애를 안타깝게 여기신다는 의미이다.
셋째, 전인 구원적인 장애인선교를 하셨다. 마태복음 9:1-8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들것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지체장애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의 장애를 고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9:1-41에는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을 고치시고 자신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전도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치료하시는 전인 구원적인 사역을 하셨다.
넷째, 부정적인 장애인 관을 긍적적인 장애인 관으로 바꾸셨다. 우리는 그것을 요한복음 9:2-3에서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8:1-4에서 예수님은 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은 죄의 결과로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죄로 인한 부정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병환자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으며, 만지지도 못하게끔 율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지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이것은 장애를 보는 눈이 일반인과 다르셨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섯째, 장애인 선교를 통하여 일반인 선교를 이루셨다. 마태복음 4:24-25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자 그의 소문이 퍼져 많은 무리가 좇았다고 했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장애인을 고치시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만,고침받은 장애인은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했다.
이와 같이 한 장애인이 예수를 만나 변화된다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듣게 된다. 그래서 장애인 선교는 단순히 장애인들에게만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된 삶과 사랑의 장애인 선교현장, 장애인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토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전을 주는 생산적인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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